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레스덴 폭격 (문단 편집) == 폭격의 결과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Bundesarchiv_Bild_146-1994-041-07%2C_Dresden%2C_zerst%C3%B6rtes_Stadtzentrum.jpg|width=100%]]}}}|| >'''온 천지가 죽음, 죽음, 죽음이다.''' 일부는 석탄처럼 완전히 새까맣다. 일부는 마치 잠이라도 든 양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누워 있다.[* 화재로 인한 질식사로 추정된다.] 앞치마를 입은 여성들, 아이들을 데리고 전차에 앉아 있는 여성들, 그들은 방금 깜빡 잠이 든 것 같다. 일부 파편에 팔과 머리와 다리가 찔리고, 두개골이 박살났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상|큰 노란 반점과 갈색 반점을 몸에 지닌 채 부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옷은 여전히 빨갛게 불타고 있었고 나는 거울을 달라고 했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얼굴은 물집 덩어리였고 눈은 찢어진 구멍이었다. >---- >― 드레스덴 폭격 생존자 마르그렛 프라이어의 증언[* 《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한겨레신문사, 222~223쪽] >정말이지 드레스덴은 멋진 도시였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아니, 내 말을 꼭 믿어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리 부자 아버지를 두었어도, 내 말이 맞는지 알아보려고 기차를 타고 드레스덴으로 갈 수는 없다.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단 하룻밤 사이에, 단 한 번의 손놀림으로 그 도시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이 만들어지기에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그 도시를 땅 위에서 날려버리기엔 두어 시간으로 족했다. 1945년 2월 13일의 일이었다. 전투기 800대가 수류탄과 폭탄을 퍼부었다. 그리고 허허벌판만 남았다. 뒤집힌 원양 어선처럼 보이는 몇 무더기의 거대한 잿더미와 함께. >---- >― [[에리히 캐스트너]][* 자서전 격인 《내가 어렸을 때》에 실린 내용. 드레스덴이 제대로 복구된 것은 캐스트너가 죽고 20년이 넘게 지난 [[독일 재통일]] 이후였다.] '''[[엘베 강]]의 [[피렌체]]로 불리던 고도(古都) 드레스덴은 이 폭격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버렸다.''' 시가지 중 6.5제곱킬로미터가 파괴되었고, 150,000채 이상의 집들이 무너졌지만 인명 피해의 경우 꽤 논란이 많다. 드레스덴 [[경찰]]의 진술에 의거해 작성된 독일의 공식 보고서인 《Tagesbefehl Nr. 47》("일일지령, TB47")에 따르면 3월 22일에 집계된 사망자 수는 알트마르크트에서 소각된 6,865명을 포함하여 총 20,204명이며 전체 사망자 수는 약 25,000명으로 추정되었다. 다른 보고서에는 4월 3일에 집계된 시체 수가 22,096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립 공동묘지에는 21,271명의 희생자가 공습으로 인해 시립 묘지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17,295구는 헤이데프리에드호프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집계는 알트마르크에서 화장한 재도 포함. 또한 이 집계는 다른 지역에서 매장된 희생자들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이 수는 분명치 않다.] [[1966년]]에 [[동독]] 치하에서 재건을 위한 공사 도중에 1,858구의 희생자가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했다. 더 이상 시체가 발견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통일 직전인 [[1989년]]에 새로운 [[빌딩]]을 건설하기 위하여 기초 공사를 하던 중 또다시 폭격으로 희생된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뒤늦게 발견된 10,000구의 시체를 포함해서 당국의 권한에 의해 제외됐던 희생자의 수를 합하면 모두 35,000명 정도 된다. 다만 21세기의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러 외적 요인을 합쳐도 사망자는 25,000명을 넘지는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일반적으로 22,700여 명으로 추산한다. 인명 피해의 규모와 관련한 가짜 정보는 독일에서도 상당한 골칫거리인지라 2004년 드레스덴 시 당국에서 역사위원회를 구성해 약 6년간 연구하여 사망자 규모를 18,000~25,000명으로 결론짓기도 했다.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드레스덴으로 서류상의 거주지를 옮기지는 않았는데 드레스덴에 있었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소련군을 피해 연합군에 항복한 지역으로 가려던 중이었다.] 건물이 붕괴되거나 고온으로 인해 시신 자체가 소멸되면서 사망자를 집계하는 데 어려움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사망자의 수를 100,000명 이상으로 잡기도 한다. 하여튼 수만 명이 넘게 죽었기 때문에 수북히 쌓인 시체를 사람들은 트럭과 수레로 실어 날랐다. 그리고 트랙터를 동원하여 집단 무덤을 팠지만 시체 양이 어마어마했기에 전부 다 묻지 못해 시체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이에 당국에서는 시체들을 한꺼번에 [[화염방사기]]로 오래된 시청 앞 광장에서 화장시켰는데 드레스덴 폭격의 생존자들은 평생 그 참혹한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당시 드레스덴에 있었던 유일한 한 개의 방공호의 경우, 구조팀이 몇 시간 후 방공호에 진입하자 폭격으로 인한 뜨거운 공기에 뼈와 살이 녹아내려 생긴 피떡 그 자체인 곤죽이 된 시뻘건 액체들이 쏟아졌다고 한다. '''한편 [[괴벨스]]는 이걸 또 제대로 선전에 이용했다.''' 그는 폭격의 피해를 축소하지 않고 오히려 과장하여 드레스덴 폭격의 추측 사망자 수인 25,000명에 '''0을 하나 더 붙여''' 무려 200,000명으로 만든 다음 이 거짓 정보를 [[스웨덴]]과 [[스위스]]의 중립국 언론에 살포했고[*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데 만약 독일이 [[가짜 뉴스]]를 독일 주간지에 살포했으면 독일의 프로파간다라고 즉각 검열되거나 설렁 뉴스가 퍼져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빙성이 비교적 높았던 중립국 언론으로 이런 정보가 살포되자 많은 시민들이 무분별하게 가짜 뉴스를 믿었다.] 이는 후술할 연합국에서도 심한 반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도 똑같이 폭격을 수행하긴 했으나 위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부터 미군 항공대는 민간인 거주지역에 대한 폭격을 자제했기 때문에 비난의 포화를 피해갈 수 있었고 영국 공군과 비교했을 때 미군의 정밀 폭격은 독일 군수산업에 더 많은 피해를 끼친 것으로 확인되었다. 드레스덴 공습의 결과를 전해받은 처칠은 이후 >"무차별 폭격만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잿더미가 가득한 곳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밖에 없다." 며 독일 도시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그만두었다. 이후 영국 공군은 3개월 동안 베를린 폭격을 시행했으나 수천 명의 인명과 700여 대의 폭격기를 손실한 것에 비해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서[* 애초에 베를린은 독일 도시들 중에서 루르 공업지대와 함께 최강의 방공능력을 가진 곳이었다.] 아서 해리스와 영국 공군 주도의 전략 폭격의 유용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연합군에서도 이 폭격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가 벌어졌다. 괴벨스가 중립국 언론을 통해서 살포한 가짜 뉴스를 전해들은 연합국 시민들은 먼저 미군을 비난했다. 그러자 미군은 전술했던 대로 군수공업 시설만을 폭격했다고 주장했고 이에 시민들은 영국과 처칠을 비난했다. 그러자 처칠은 아서 해리스가 이 폭격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며 해리스에게 모든 책임을 넘겨 버렸다. 결국 이 폭격과 처칠의 책임 떠넘기기는 이후 [[아서 해리스]]의 인생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전후 아서 해리스는 영국 의회 청문회에 출두해야 했고 그는 영국 전략 폭격기사령부의 영웅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해리스의 별명인 '''백정 해리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의 행적을 본다면 변명거리가 없긴 하다. 저 별명은 애초에 민간인 폭격이 아니라 폭격기 승무원들의 엄청난 손실에도 알게 뭐냐는 태도로 나와서 폭격기 사령부에서 붙여준 별명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더글러스 헤이그]]가 '''도살자 헤이그'''라고 불린 것과 비슷한 케이스이다.] 영국 폭격기대대의 잔학성은 함부르크 대공습에서 다시 한 번 그 위용을 떨쳤는데 영국은 미8공군에도 협조를 요청했지만 스파츠 대장을 위시한 8공군은 "좆까"로 무시했고, 미 공군은 철도역과 도시 외곽 공장지대만 정밀 폭격했다. 반면 영국 폭격기대대는 민간인이 몰려 있는 도심에 소이탄을 떨어뜨렸고 민간인 수만 명이 이 폭격에 휩쓸려 사망했다. 이 일로 영국 폭격기대대는 연합군 측에서 인간 말종 수준으로 치부되었고, 처칠은[* 물론 이 폭격을 승인한 것도 처칠이라는걸 생각하면 그냥 책임 전가일 뿐이지만. 애초에 저 양반이 저런 짓 하는 게 일상이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반발을 고려하여 종전식에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부대들을 열거할 때 영국 폭격기대대와 아서 해리스를 고의로 불참시켰다. 또한 드레스덴 폭격에 가담한 영국 공군 소속 전략 폭격사령부의 전사자들에 대한 대접은 완전히 제외되었다. 이들이 공식 석상에서 언급될 수 있었던 건 작전을 수행하고도 67년이 지난 후인 2012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